우리 민족사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대하 역사소설을 왜 가지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13년 동안 11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의 현장을 누비면서 발로 쓴 <칙령>은 왜곡되고, 오해되어 전해지고 있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중국의 「삼국지연의」, 일본 「대망」을 능가하는 역사 소설을 쓰고자 저자는 젊음을 받혀 피와 땀으로 이 소설을 기록하였다.
26차례 벌어진 후삼국 전투지의 정확한 지역을 찾지 못해 헤맸던 것이나 1,0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전개하며 겪는 어려움과,
전투지에 관련된 전략과 전술을 짤 때의 긴장감, 또한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맞물러 팔십 명이나 되는 인물의 이야기에 특히
정성을 쏟았을 때의 성취감, 며칠 동안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 난감함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에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지만,
저자는 실감나는 전투 장면과 실사적인 사건의 표현, 등장인물의 성격과 서로 대치할 때의 긴장감 등을 생생하고, 극적으로 그려놓아
읽는 재미와 더불어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여 준다.
칙령을 위하여 보낸 수많았던 어려움과 고통들을 다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생활고였다.
숯불 피우는 곳에서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와 산불 감시원을 몇 년 동안 한 적도 있었다.
칙령은 글로 쓴 소설이 아니라 저자의 피와 땀으로 기록한 역사 기록으로 흔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본 소설은 진정한 우리 민족 알기와 바로 세우기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소설적인, 재미도 겸비하고 있어
중국 「삼국지연의」, 일본 「대망」을 능가하는 우리만의 역사 소설로 거듭 날 것이다. 칙령은 역사 대하소설로 18권 발간 예정이다.
<한비출판사에서는 제본, 인쇄를 담당하였음>
<출판 : 도서출판 전화앵>
<저자 소개>
어린 시절부터 사회의식이 강한 집안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세상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오랫동안 공부해온 폭넓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대한민국과 경주가 근본적으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에서 이 방대한 소설을 집필했다.
이 대하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30만km의 차량을 운행했고, A4 용지만 하더라도 무수히 버리고 또 버렸다.
현지답사를 하다가 천둥 번개를 만난 적도 있었고 멧돼지와 부딪쳐 두려움에 떤 적도 있었다.
산 정상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또 산언덕에서 눈이 펑펑 내린 적도 있었다.
얼음이 얼어서 차량이 도랑에 빠져 위험했던 순간과, 길을 잘못들어서 가시덤불에서 수많은 가시에 찔리며 고생한 적도 있었다.
26차례 벌어진 후삼국 전투지의 정확한 지명도를 찾지 못해 헤맸던 것이나 1,000명이 넘는 인물을 전개하며 겪는
어려움과, 전투지에 관련된 전략과 전술을 짤 때의 긴장감, 또한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맞물러 80명이나 되는
인물의 이야기에 특히 정성을 쏟았을 때의 성취감, 며칠 동안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 난감함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에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다.
2018년 제7회 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 경주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현재 파워 유튜버로 활동하면서 정치와 역사에 관한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
<작품 소개>
P18. 대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유학자를 배출하는 동안 귀족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심에 빠진 대왕이 국학에서 배운 학자들을 당나라로 유학 보냈다. 그들이 당나라에서
좋은 벼슬들을 통해 견문을 두루 익히게 하여 왕권강화에 이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왕의 기대와 달리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꿈과 신분을 신라에서는 보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왕 재위 기간 진표율사에게 삭주와 명주 일대에 사찰들을 창건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진표율사는 끝내 신라인이 아니라 백제인으로 남았다. 왕실에서 하사한 국사 자리를 열반할 때까지 받지 않았다.
진표율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백제인이 신라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열반했지만 숭고한 진표율사의 뜻과 상관없이 삭주와 명주에는 이미 신라 멸망의 씨앗이 조금씩 자라나 고 있었다.
진표율사의 사후에 영심, 보종, 신방, 체진, 진해, 진선, 석충 등이 미륵신앙을 계승하였는데,
영심은 진표의 적통이며 융종 불타와 더불어 속리산에 길상사를 창건하였다. 영심의 으뜸 제자는 심지인데,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에서 수행했다. 이후 그들의 제자들이 공산전투에서 견훤을 도와
P77. 많은 백성을 벽골군(김제)으로 강제로 집단 이주시켰다. 김제 금산사에는 노예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진표율사의 미륵 부처 사상을 받아들이니 훗날 견훤이 후백제를 창업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바로 장보고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신라 귀족들에게 이를 갈며 복수의 나날만 기다렸다.
그들에게는 현세가 지옥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면 바로 현실을 극복시킬 참 미륵이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P101. “그 입을 다물어라. 경은 입이 열 개라도 되느냐? 당장 입을 다물지 않으면 구족이 화를 면치 못하리라.”
“폐하, 신은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라 폐하의 나라가 영원하기를 바라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왕이 즉시 소판 이거명을 하옥시켰다.소판 이거명이 하옥 당하자 신료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대왕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처음 대왕이 왕위계승 할 때는 소판 이거명의 도움을 받았으나 김민공(金敏恭, 경순왕의 증조부)으로 하여금
반대세력을 처단하게 하였으니 이거명은 그대로 제거 당했다.
P172. 양길의 세력이 갈수록 성장한다는 소식에 신라 조정이 발칵 뒤집혀 졌다.
이에 여황이 예겸과 준홍에게 사병들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예겸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박씨 왕조를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여황을 압박하고 신라 황실의 힘이 약화되기를 원했다.
황권이 갈수록 나약하기를 소원한 셈이니 여황을 괴롭히는 것도 그의 계산된 행보였다.
단지 어리석은 생각은 반란자 양길이 별것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보낸 세작들이 대부분 양길에게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한 연고로 도리어 역정보를 받게 되었다.
거기다가 도리어 그 세작들은 양길의 눈과 귀가 되었다. 예겸이 갈수록 총명함을 잃어갔다.